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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산성이야기
  • 오두산성에 대하여

    오두산의 유래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이 밝혀진 바 없습니다.
    다만 마을의 촌로들에 의하여 오두산(烏頭山)을 멀리서 바라볼 때 "까마귀머리"와 같은 형상으로 보이기 때문에 오두산이란 명칭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보아도 그러한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오두산의 별칭은 오도성산(烏島城山), 구조산(鳩鳥山, 비둘기산)등으로 불리고 있어 새의 머리형상을 닮은 지형을 묘사한데서 유래하였습니다.

    이 성은 오두산 정상을 싸고 축성된 테뫼식 산성으로 광개토왕비문에 기록된 관미성(關彌城) 또는 각미성(閣彌城)으로 보기도 합니다.

    오두산성은 한강과 임진강의 하류가 만나는 곳에 있으며, 매우 가파른 비탈과 삼면이 바다로 싸여 있어 군사상 요충지입니다.
    백제의 북방 전초기지였던 관미성은 병신전쟁(丙申戰爭,396)에서 고구려 광개토왕의 수군에 함락됨으로써 백제의 국도인 하남 위례성이 포위되는 등 위기를 맞을 만큼 중요한 성이었습니다.

    외성 둘레가 1,228m, 내성둘레 1,240m의 석성(石成)과 호성석벽(護城石壁)의 토성을 갖추고 있는 특징을 한 산성이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를 통하여 계속 수축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성은 한국전쟁 이후 거의 유실, 파손되었으나 1990년 9월부터 1991년 11월 사이의 발굴조사에서 규모가 밝혀지고,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친 토기, 백자, 청자, 기와, 철촉 등의 유물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 부근 일대에는 수백여기의 고분이 산재되어 있는데 최근에 삼국시대의 왕관, 장경호 토기, 방추자 등이 발견됨에 따라 삼국시대의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역사적인 중요성을 갖는 오두산성은 현재의 통일전망대가 갖는 통일안보체험교육장으로서의 위상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즉, 분단의 현실을 체감하는 현장에 존재하는 오두산성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역사적 유물입니다.

    현대의 통일안보체험교육장 오두산전망대에서 백제시대 북쪽 변방에 있던 관방유적의 성벽과 출토유물을 함께 관람함으로써 이곳을 찾는 관람객이 우리시대 통일안보는 물론 삼국시대의 안보역사까지를 체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향후 통일부, 문화재청과 파주시의 계획에 의하여 오두산성 관람편의를 위한 제반시설이 정비, 확충되어감에 따라 오두산통일전망대는 안보체험교육장의 명소이자 과거(삼국시대)와 현재(분단현실), 미래(통일조국)를 잇는 역사현장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오두산성의 위치와 성곽

    [자료 : 파주 오두산성 정밀지표조사 보고서, (재)한백문화연구원, 파주시, 2008]

    오두산성은 그동안 단곽성으로 알려져 있으나,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된 복광성으로 통일전망대를 기점 내성을 따라 외성이 둘러싼 형태입니다.
    내성은 기존에 단곽성으로 알고 있었을때 조사된 성곽의 형태로 통일전망대가 위치한 봉우리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3개의 가지능선의 상면을 감아 돌고 있는 새의 부리 또는 발톱과 같은 모양으로 전체 규모는 동서 320m, 남북 280m이며 둘레의 길이는 외성과 비슷한 1,240m정도 입니다.
    외성은 내성 북벽과 서벽이 남쪽 능선을 흘러내리다가 성벽의 끝부분을 이으며, 2개의 계곡을 가로지르고 있는 남쪽이 뾰족한 새부리 혹은 새 발톱 모양을 하고 있으며, 전체 규모는 동서 320m, 남북 380m이며 둘레 길이는 1,228m정도 입니다.

  • 옛문헌에 나타난 위치
  • 관미성과 오두산성

    [MBC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 나온 백제 관미성]

    관미성이란 명칭은 삼국사기에서 여러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4세기 후반대에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백제와 고구려의 격전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기록으로 보아 일단 관미성의 축조 시기는 4세기 후반 이전일 가능성이 높으며, 관미성은 4세기 후반 이전에 축조되어
    백제의 북변을 담당하는 군사 요충지로 기능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관미성은 천연의 험준한 지세위에 축조한 성으로, 사방에 바닷물로 둘러싸인 장소에 위치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재 관미성에 대한 위치는 비정 및 연구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위에서 볼때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 처음으로 오두산성을 관미성으로 비정하였고. 1984년 윤일영에 의해 비정되어,
    이후 경희대학교에서 오두산성 일부지역을 발굴하여 백제에 의해 축조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두산성을 관미성으로 비정하기 위해서는 출토된 고고학적 자료를 분석하여 관미성과 관련되는 근거를 찾아내어야 하며,
    오두산성에 대한 계획적이고 연차적인 발굴을 진행하여 밝혀내야 할 과제입니다.

  • 오두산성 출토 유물

    [기와조각(좌), 토기조각(우)]

    오두산성에서 수습된 유물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시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대부분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파편상태의 기와류가 다수이며, 소량의 토기류가 있습니다.
    발견되는 기와편을 살펴보면 대략적으로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 기와까지 여러 시기의 기와연이 포함되어 있으며, 토기는 통일신라의 특성을 지는 것부터 고려초기에 해당하는 것까지 출토되었습니다.
    이로 볼때 오두산성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초기까지 적극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오두산성의 보존

    오두산성은 삼국시대부터 한강 하구의 방어와 관련하여 중요시 되었던 것으로 추정되어 집니다.
    특히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에 등장하는 고구려와 백제의 격전지인 관미성의 지형과 유사하여 오두산성은 학계에서 백제의 관미성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윤일영)

    현재 오두산성 정상부에는 우리 통일전망대가 위치하고 있으며,통일저망대 조성시 일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이후, 2008년 한백문화재연구원과 파주시에서 정밀지표조사 보고서를 작성한바 있으나, 오두산성의 축성시기 및 그 이후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기에는 아직 부족합니다.

    오두산성은 변화되고 훼손된 부분도 많지만 아직 잔존 상태가 양호한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오두산성이 더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정부와 관할지자체에서는 정밀 지표조사와 정비계획 수립이 무엇보다 필요하며, 오두산성의 역사적 중요성을 관광객들에게 홍보하고, 설명 책자 배포와 안내판 정비 및 설치를 하는 등의 정비계획 및 활용방안에 대한 검토와 역사적 중요성에 대한 계속된 연구가 필요합니다.

  • 경향신문 보도기사

    경향신문(2007.03.20 20:03 / 이기환 선임기자)

    고구려 백제 치열한 106년 전투 '관미성'

    "저기가 북한입니다. 한 3km 떨어졌을까요. 저기 보이는 곳은 북한의 선전촌이고요. 김일성 사적관도 보이고..."
    경기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엔 오두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요즘은 통일전망대로 더 유명한 야트막한 산(해발 112m)이다.
    뿌연 안개 사이로 갈 수 없는 땅 북한 관산반도가 어렴풋이 보인다. 손에 잡힐 듯 지척이다.
    "썰물 때는 도섭(걸어서 건널 수 있는)할 수 있는 지점도 조금 더 가면 있어요."

    1600여년전 고구려와 백제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인 파주 오두산성.
    지금도 산성의 정상부에 자리잡고 있는 통일전망대가 남북분단의 아픔을 전하고 있다.
    -탄현/권호욱기자-

    임진강과 한강이 만난다해서 교하라 했던가. 윤일영 예비역 장군의 말이 새삼스럽다.

    팽팽한 남북 분단의 상징.....
    1600년 전에도 그랬다.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쟁탈의 요서임을 금방알수 있다.
    문헌상 기록으로도 우리는 4~5세기 이곳을 무대로 대서사시를 썼던 고구려와 백제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상황을 묘사할수있다

    신의 근원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쇠 가 신의 국경을 짓밟아... 화살과 돌로 싸워 쇠의 목을 베어 달았습니다.
    (삼국사기 개로왕조)

    472년 고구려 장수왕의 압박에 위기감을 느낀 백제 개로왕이 중국 위나라에 원병을 요청한다.
    하지만 수포로 돌아간다. 장수왕은 3년 뒤 백제 수도 한성을 공략한다. 망명한 백제인이었던 고구려 장수 걸루와 만년은 한때의 주군이던 개로왕의 얼굴에 3번이나 침을 뱉은뒤 죽인다.
    이로써 106년에 이르는 피어린 4~5세기 고구려...백제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마감된다.

    개로왕의 언급처럼 고구려와 백제는 뿌리가 같은 부여였다
    "선세 때는 옛 우의를 도탑게 하였는데..."라고 했던 개로왕의 표현대로 4세기 중반까지 고구려와 백제는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

    하지만 백제 근초고왕이 369년 첫 도발 이후 백제를 참략해온 고국원왕을 평양성에서 죽이면서(371년)피나는 혈투가 이어진다. 때는 바야흐로 마한의 소국들을 병합한 한성백제가 최전성기에 이를 무렵이었다.

    최종택 고려대 교수에 따르면 369~390년 사이 고구려-백제전의 승자는 백제였다.
    백제는 10번의 전투에서 5승1패(4번은 승패불명)의 압도적인 우위를 보인다.
    비명횡사한 아버지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으려던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의 복수전은 실패로 끝났다는 뜻이다.
    하지만 고국원왕의 손자인 광대토대왕이 즉위하자(392년)
    승부의 저울추가 고구려 쪽으로 기운다.

    광개토대왕은 392년(광개토대왕비문에는 396년)4만 군사를 이끌고 백제석현성 등 10성을 함락시킨다.
    관미성을 얻은 광개토대왕이 수군을 이끌고 아리수(한강)를 건너 백제의 국성을 포위한다.
    백제왕(아신왕)은 남녀 1000명과 세포 1000필을 헌납하고 무릅을 끓는다.

    "지금부터 영원한 노객이 되겠나이다"

    광개토대왕은 백제 59개성과 700촌을 얻고는 개선한다.아신왕은 피눈물을 흘린다.
    특히 관미성을 잃음으로써 굴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신왕은 1년뒤
    동명묘에 절하고 제단을 쌓아 기도를 드린 뒤 진무 장군에게 특명을 내린다.
    관미성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충지인데 고구려에게 빼앗겼다. 과인은 너무 분하다.
    반드시 설욕하라!(삼국사기 아신왕조)

    백제로서는 임진각 이북의 석현성 등 빼앗긴 10성을 되찾기 위해 반드시 먼저 탈환해야 할 관미성 공략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보급로 차단으로 아신왕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관미성을 고구려-백제의 치열한 쟁탈의 요서였던 것이다.
    고구려가 이 성을 수중에 넣은 뒤 전세는 급격하게 고구려로 기운다.
    한성백제는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급기야 475년 왕(개로왕)이 장수왕의 공격에 전시하고 한성이 함락된다.
    고구려는 최전성기에 접어들었고 한서백제의 역사(493년)는 종지부를 찍는다.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는 더는 웅비의 꿈을 펼치지 못한다.

    관미성 바로 이성은 고구려- 백제의 치열한 106년 싸움을 상징하던 '사면초절 해수환요'의 요새인 것이다.
    게다가 광개토대왕의 병신년 기사(396년)에 보이는 58개 성 가운데 유일하게 구체적인 성의 모습이 기록됐다.

    하지만 관미성이 과연 어디인지는 누구도 밝혀내지 못한 채 설만 설설 끓는 형국이었다.
    강화도설과 예성강 유역설, 그리고 임진각 한강 교회지점설 등이 어지러이 제게되었다.

    그러던 1985년 지금의 오두산 지역 관할부대 대대장으로 부임한 윤일영 중령이 죽목할 만한 발견 을 하게 된다.
    육사생도 시절부터 임진왜란 당시의 70개 전투를 줄줄 암기할 정도로 전쟁사에 관심을 많았던 인물이었다.

    우연히 김정호의 대동지지(1864년) 교하편을 보았습니다.
    거기엔 오두산성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곳이며, 본래 백제의 관미성이다 란 문구가 있었어요.
    육사시절 은사인 허선도 교수에게 보여주니 그분이 무릎을 탁 치더군요.
    관미성의 위치를 문헌상으로 처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자네. 이걸로 석사논문 쓰게. 대학원에 바로 들어와"

    허교수는 '관미성 위치고'라는 논문 제목까지 정해주면서 제자의 '발견'을 격려한다.
    어찌보면'어이없는 발견'일 수도 있다.
    사료에 분명 적혀 있는 거로 모르고 지금껏 지형 조건과 고대어의 음운체게, 구구려군의 진출 경로 등을 통한 '탁상공론'에만 몰두했기 때문이었다.

    이 오두산성이 통일전망대로 개발되기에 앞서 경희대 발굴팀이 지표조사를 벌인 겅이 있다(1990년)조사단은 이성이 바로 관미성이란 확증을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관미성일 가능성이 많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광개토대왕이 7개 방면으로,20여 일게 걸쳐 힘겹게 공략한 후 겨우 함락시킬 정도로 '사면초절'하다는 점과 밀물 때는 바닷물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감안한다면 '해수환요'의 조건에 딱 맞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2006년)7월 오두산성 성곽보수 관련된 유구조사 등 몇 차례 조사에서 백제토기가 발견되었다는 점도 심상치 않다.

    심정보 한밭대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백제식 축성기법(정상부를 띠로 두르듯 쌓았고, 산기슭을 ㄴ 자로 파내고 한 쪽만 석축한 성)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어요.
    백제 기와도 나오고...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면 오두산성이 관미성일 가능성은 많다고 봅니다.
    다만 고고하적인 발굴에 더 진행되고, 더 많은 백제유물이 나와야 하긴 하지만...."

    지금 성을 지키는 초병의 얼굴에서 1600년 전 백제 병사의 모습을 떠올린다.
    불안한 정적이 흐르는 최전방 초소에서....
    건널수 없는 강을 무시로 나는 갈매기를 보며 고향의 어머니를 그리워했겠지.

    <이기환 선임기자/탄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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